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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포스터와 레노바레의 문제점/ 조진모 합신교수
작성자 홈관리 등록일 2019-10-19 15:16:24 조회수 12

리처드 포스터와 레노바레의 문제점

 [조진모 목사 · 합신 역사신학 교수]

<이 글은 2011년 4월 18일 총회신학연구위원회 주관으로 합동신학원에서 개최된 ‘관상기도에 관한 심포지움’에서 발표된 필자의 원고를 요약 발췌한 글이다 / 편집자주>

‘레노바레 성경’은 살아서 운동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기보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능하게 하는 영적 형성을 위한 지침서이다. ... 때문에 그들에게는 성경의 영감 여부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러므로 창세기를 구전된 설화식의 이야기로 이해하는 ‘레노바레 성경’은 모세의 5경 저작설을 노골적으로 부인한다.

이제 한국교회는 포퓰리즘 뒤에 숨겨져 있는 리처드 포스터와 레노바레의 정체성으로 인하여 계속된 신학 논쟁은 종식되어야 한다. 도리어 영성이라는 이름으로 교회 안에 깊이 들어와 있는 비성경적이며 반종교개혁적인 보이지 않는 큰 힘을 대항하여 한국교회와 성도들을 보호하여야 한다.

서 론

교회성장과 성도의 성숙에 결정적인 ‘그 무엇’을 제공해 준다는 말이 들리기만 하면 이 ‘새로운 것’의 기초를 이루는 사상과 신학에 대한 검토도 없이 이것은 교회 안에 열병처럼 퍼지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도 잠시 뿐이다. 대부분은 그저 하나의 이벤트로 그치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연못은 다시 고요해 진다. 그러다가 다른 돌이 던져지면 연못은 다시 요란해진다. 한국교회에서는 이런 일을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레노바레(Renovar�는 ‘새롭게 하다’ ‘회복하다’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이다. 이 운동은 1988년에 미국과 한국 교계에 잘 알려져 있던 리처드 포스터(Richard J. Foster)에 의해 시작되었다. 정작 레노바레의 출발지인 미국의 교단들은 양극의 반응을 보여 왔다.

레노바레가 ‘교회 갱신’을 위한 운동으로 소개되면서 한국에서 공식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것은 2005년의 일이다. ‘그 무엇’을 찾고 있던 한국교회 목회자들에게는 레노바레는 효과가 보장된 영향력을 지닌 ‘새로운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초창기부터 한국교회는 레노바레의 정체성에 대한 상반된 의견으로 인하여 혼란을 경험하게 되었다.

문제의 핵심은 과연 레노바레가 신비주의적이며 카톨릭 영성에 기초하였느냐는 것에 있었다. 레노바레에 긍정적인 목회자들은 이러한 가능성을 애써 부정하였지만, 이 운동에 우려를 표하던 보수적 목회자들의 목소리도 쉽게 수그러들지는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2007년 10월에 한국을 방문한 포스터는 기자회견 자리에서 직접 이 문제에 답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신비주의’라는 용어의 사용을 자제하면서 자신이 인용하는 16세기 이전의 사람들이 카톨릭 교인들이라고 설명함으로써, 신비주의와 카톨릭 영성과 직접적인 상관이 없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레노바레와 관련된 신학적 논쟁은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요즈음도 그칠 줄 모른다. 문제의 핵심은 여전히 신비주의와 카톨릭 영성과 관련되어 있다. 레노바레의 대표인 포스터가 공개적으로 부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신학의 정체성을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포스터가 진실을 감추고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보수적인 목사들이 그의 신학사상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 베일에 가려져 있는 포스터와 레노바레의 정체성

1) 포스터의 레노바레

리처드 포스터는 1978년에 출판된 ‘영적 훈련과 성장’으로 미국의 복음주의 진영에서 큰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 후로 그는 전보다 훨씬 바쁜 강의와 목회 일정 속에 살아야 했다. 그러나 1986년 가을, 그는 모든 사역을 중단하고 자신만의 시간을 갖기 위하여 결단하였다.

긴급하고 중요한 일로 빼앗겼던 자신만의 시간을 되찾기 위하여 모든 공적인 일에서 손을 놓은 것이다. 그는 이후로 조용한 시간을 보내면서 성도들의 영적 성장과 교회의 갱신을 도울 수 있는 세계적인 기독교 운동을 새롭게 구상하게 되었다. 그 결과 1988년 11월에 그를 대표로 하는 레노바레가 공식적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그 당시 포스터는 앞서 언급한 Celebration of Discipline 외에도, 그가 1985년에 저술한 ‘돈, 섹스, 권력’으로 미국 전역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 되었다. 이 책은 기독교의 울타리를 넘어 불신자와 타 종교인들도 즐겨 찾는 도서가 되었다. 그 후로 사람들은 그를 이 시대가 귀를 기울여야 하는 선지자와 같은 목소리를 지닌 인물로 추앙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포스터가 레노바레를 소개하자, 그의 책을 통하여 그와 친숙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이를 크게 환영하며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이런 현상이 유사하게 재현되었다. 기독교 서적을 자주 접하는 대부분의 독자들은 포스터가 저술한 서적을 통하여 그의 이름을 잘 알고 있었다. 위에 언급한 ‘영적 훈련과 성장’, ‘돈, 섹스, 권력’이 넓은 독자층을 확보하였음은 물론, 그가 1992년에 저술한 ‘기도’가 17만 권이나 팔리며 그는 한국교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이렇게 이미 구축된 그의 명성이 ‘포스터의 레노바레’가 한국에 쉽게 상륙하는 데 일조하였다.

그러나 이런 과정에서 생겨난 중대한 문제가 있었다. 한국교회가 포스터라는 인물이나 레노바레의 정체성에 대하여 정확히 파악하기도 전에 ‘포스터의 레노바레’로 수용된 것이다. 그러나 영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던 때에, ‘이 시대의 영성을 주도하는 포스터의 레노바레’는 참 좋은 소식으로 여겨지는 분위기였다.

 

2) 레노바레와 내적 성장

영적 성장과 교회의 근본적인 갱신의 필요성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초대 교회의 시기부터 각 시대별로 교회가 처해있던 상황 속에서 고민하여 온 주제이다. 그러나 레노바레는 그 출현 초기부터 외적 성장이 아닌 내적 갱신을 강조하였다. 그 당시 미국 교회와 한국 교회가 처한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다.

1955년에 ‘하나님의 다리’라는 책을 출판한 도날드 맥가브란(Donald McGavran)은 1965년에 미국의 풀러신학교에 세계선교대학(School of World Mission)을 설립하였다. 이 일은 전 세계의 교회가 ‘교회성장학’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특히 전 세계의 현대복음주의자들은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불신자를 교회로 끌어와야 한다는 새로운 목표를 세우며 교회의 외적 성장을 위하여 최선을 다했다. 심지어 그들은 불신자들에게 맞추기 위하여 교리적 순수성을 희생하는 것도 불사하였다. 예배의 스타일도 전통적인 모습을 버리고 현대인의 구미에 맞도록 새롭게 바꾸었다. 강단에서는 가급적이면 죄와 회개에 대한 부담을 주지 않는 값싼 복음을 외치게 되었다.

그 결과 1970년대에부터 대형 교회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교회에 속한 교인들의 숫자가 목회자의 능력을 판가름하는 척도가 되었다. 숫자가 성공의 기준이 되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교인의 숫자를 늘리는 데 전력을 다하게 되었다.

그러자 조심스럽게 예견되었던 문제점이 드러나게 되었다. 성도들이 영적으로 갈증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교회의 외적 성장은 성도들의 내적 필요를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 그 결과 성도들이 영적 성숙에 대한 관심을 잃어갔다. 교회출석이 곧 신앙의 전부라는 생각이 보편화되었다. 이렇게 교회성장은 상대적으로 영적 빈곤을 가져다 주게 된 것이다.

급성장을 해오던 한국교회는 80년대 말부터 마이너스 성장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침체기에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교회 안에는 새롭게 변화되어야 한다는 자성의 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그 염려는 중단된 교회의 성장을 지속시키는 방법을 모색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을 뿐, 성도들이 영적으로 채워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반성한 것은 아니었다. 2005년, 레노바레가 한국에서 공식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였을 때의 한국교회는 많이 지쳐 있었으며 영적으로 굶주려 있었다.

부흥회와 철야기도 등 ‘열정적인 신앙훈련’에 익숙해져 있는 한국교회에 ‘영적 형성’이 소개되자, 이것을 ‘조용한 신앙훈련’ 내지는 ‘고상한 신앙훈련’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 당시 사회 전반에 걸쳐 인간의 내면의 세계에 대한 관심이 유행으로 번지고 있던 상황에서, 내적 성숙을 강조하는 레노바레는 이 시대에 걸맞는 훌륭한 새로운 영성 운동으로 받아들여졌다.

 

3) 레노바레의 에큐메니칼 정신

포스터는 레노바레를 시작하면서 일종의 연합전선을 구축하였다. 그는 이 운동을 특정한 교파 또는 신학적 전통에 국한시키려 하지 않고, 에큐메니칼 정신에 맞추어 교계 내의 보다 넓은 범위를 대상으로 시작하였다.

1948년에 첫 총회를 가진 WCC 운동의 세력이 확장되면서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협력할 것을 주장하는 에큐메니칼 정신은 이미 보편화되어 있었다. 레노바레가 에큐메니칼 정신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은 미국 레노바레 웹사이트를 통해서도 쉽게 알 수 있다.

현재 미국 레노바레 본부에서 사역하는 자들의 교단은 매우 다양하다. 그들은 침례교, 퀘이커, 성공회, 자유 감리교, 미국 침례교, 로마 카톨릭, 미국 복음주의 장로교, 루터파, 연합감리교, 하나님의 성회, 그리스도 하나님의 교회, 남침례교, CMA 등에 속해 있다.

레노바레의 에큐메니칼 정신을 좀 더 분명하게 보여주는 증거는 포스터가 편집하여 2005년에 출판한 ‘레노바레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50명이 넘는 집필자들의 프로필에 나타난 다양성이 매우 흥미롭다. 오랫동안 영성 신학을 가르쳤던 미국장로교회(PCUSA) 목사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에서부터 퀘이커 신학교인 조지폭스 대학교의 종교학 교수 하워드 메이시(Howard R. Macy)까지 이 프로필 목록은 레노바레의 에큐메니칼 정신을 그대로 드러내주고 있다.

한국에 레노바레가 소개될 때에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다. 레노바레는 그 시작과 함께 교단과 신학의 정체성을 뛰어 넘는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이 운동이 도입할 때 중추적인 역할을 인물들과 현재 한국 레노바레를 섬기고 있는 인물들이 속한 교단은 매우 다양하다. 또한 한글로 번역된 ‘레노바레 성경’도 다를 바가 없다. 이 책의 추천자들과 번역진의 배경이 유난스럽게도 다양하다.

이 책은 마치 주류 교단과 신학교가 레노바레가 널리 수용되고 있는 듯이 보이는 일종의 홍보 효과를 내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레노바레는 각 교단의 공식적 견해와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힘을 합하여 이 운동을 주도해 가고 있다. 한국교회의 각 교단에서 나름대로의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들의 후원을 받는 일에 성공한 ‘레노바레 성경’과 레노바레는, 현재 한국교회의 갱신과 성도들의 내적 성숙을 가능하게 하는 대안으로 소개된 것이다.

4) 포퓰리즘 뒤에 숨겨진 정체성

지금까지 우리는 레노바레의 대중성과 관련된 세 가지 사실을 언급하였다. 레노바레는 이 운동의 창시자인 포스터의 개인적 명성에 힘입어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보다 쉽게 수용될 수 있었으며, 교회의 외적 성장과 상반되는 내적 변화에 대한 갈증을 느끼던 상황에서 소개가 되었으며, 또한 에큐메니칼 정신에 입각하여 교단과 신학을 초월한 운동으로 그 성격을 굳혔다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레노바레를 둘러싼 신학적 논쟁이 그치지 않는 근본적인 원인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리처드 포스터라는 인물의 포퓰리즘 뒤에 레노바레의 정체성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미국교회보다 한국교회에서 더욱 심각하다. 실상 레노바레가 한국에 소개된 지 수 년이 지난 오늘에도 그 정체성은 아직도 베일 속에 가려져 있다. 현재까지도 한국 레노바레는 한국교회의 성도들에게 이 운동이 신비주의이며 카톨릭 영성에 근거한 것이라고 밝혀주지 않는다.

심지어 그들의 공식적 입장을 대변하는 웹사이트(www.renovare.co.kr)에서도 이렇다 할 언급이 없다. 그러나 미국의 레노바레의 홈페이지(www.renovare.us)는 자신들의 기본적인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이곳에서 한국 레노바레 홈페이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데, 이 운동은 바로 ‘영적 형성’(Spiritual Formation)을 통하여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다.

레노바레는 매우 생소한 방법과 목적을 가지고 내적 성장을 통하여 교회의 개혁을 이룬다는 당찬 비전에 입각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한국교회 성도와 교회를 찾아온 것이다.

홍보 차원에서 지금까지 레노바레는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인물과 그러한 위치에 있는 자들을 이 운동에 참여시킴으로써 매우 훌륭한 마케팅을 해왔다. 그러나 포퓰리즘 뒤에 그것의 정체성을 숨겨둠으로써 미성숙한 한국교회의 목회자와 성도들을 혼동 속에 빠뜨리게 한다면, 이는 포스터가 주장한 성도의 성숙과 교회의 갱신의 목적에 스스로 역행하는 일이다.

2. 레노바레의 기본 사상

1) 성경관

한국 레노바레의 대표인 이동원 목사는 ‘레노바레 성경’의 추천사에서 “이 성경을 앞에 두고 연구와 묵상이 동시에 가능하도록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라고 기록하였다. ‘연구와 묵상’은 지금까지 교회에서 전통적으로 행하여 온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발행된 성경으로도 가능한데, 무슨 이유로 레노바레에서 ‘연구와 묵상’을 위한 성경을 출판하였을까?

 ‘레노바레 성경’은 한 마디로 레노바레의 지침서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성경에는 ‘연구와 묵상’에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이 담겨 있지 않다. 성경을 체계적으로 깊이 연구할 수 있는 자료는 물론, 성경의 본문을 묵상하는 방법이나 질문의 예 등을 찾아볼 수 없다.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포스터는 독자들에게 이 책을 통하여 레노바레의 주된 목적인 ‘영성 형성’을 돕는 서적이란 사실을 염두에 두고 성경 전체를 재구성하였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레노바레 성경’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The with-God life) 일색이다. 성경의 앞쪽에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에 대한 전체 서문, 파노라마식 개관, 그리고 요약을 기록하였다. 또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소개하는 소논문을 15편이나 66권의 성경 사이에 나누어 삽입하였다. 이와 같이 ‘레노바레 성경’은 조직적으로 독자들에게 레노바레의 관점에서 성경을 읽도록 강요한다.

 ‘레노바레 성경’은 성경을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들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책으로 소개한다. 비록 살아가는 환경과 처지가 달랐어도 하나님은 그의 백성과 함께하셨다는 이야기는 성경 전체의 맥을 이해할 수 있는 중심적인 줄거리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

 그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의 모범이 되시는 분이다. 또한 그는 제자를 부르셔서 그들에게 자신과 같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 것을 분부하셨다. 그러므로 ‘레노바레 성경’이 ‘영적 형성’의 도구라는 것은, 이 성경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레노바레 성경’은 스스로 새롭게 내린 성경에 정의에 맞추어 색다른 성경 읽는 법을 제시한다. 성경 읽기, 연구, 암송, 그리고 묵상은 그 자체로서의 의미가 없으며, 이런 신앙 행위를 통한 목적은 ‘참된 생명’을 얻는 것이어야 한다고 지시한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을 주관하신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의 실재가 독자의 마음에서 일어난다고 믿기 때문에 성령의 조명을 부정하는 오류를 범한다. 그 대신 성경을 읽으면서 내면세계의 개혁이 일어나려면 ‘마음으로 읽는 방법’, 즉 ‘거룩한 독서’ 또는 ‘영적 독서’(lectio divina)를 선택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방법은 “말씀의 본문에 굴복하고 내가 말씀을 다루기보다 말씀이 내 안에 흘러들어오도록 나 자신을 내어놓는 것이다. 본문의 극적인 상황에 나의 마음과 생각이 젖어 들어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카톨릭교회에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로 고대 수도승의 전통에 근거하여 권장하는 성경 읽기법으로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길잡이로서의 역할을 중요시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레노바레 성경’ 성경은 살아서 운동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기보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능하게 하는 영적 형성을 위한 지침서이다. 성경을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께서 같이 하신 이야기로 이해하기 때문에 성경의 영감의 여부가 그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러므로 창세기를 구전된 설화식의 이야기로 이해하는 ‘레노바레 성경’은 모세의 5경 저작설을 노골적으로 부인한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신앙과 본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한 법칙이 될 수 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기 때문에 성경에 입각한 신학, 성경대로 믿는 신앙, 그리고 성경대로 살아가는 생활에 대한 강조가 정당화될 수 있다. 1920년대 미국장로교회와 1930년대 한국장로교회에서 생겼던 신학 논쟁의 핵심은 성경관이었다. 고등비평을 받아들인 자유주의자들은 모세의 5경 저작설을 부인하였다. 보수주의자들은 이에 맞서 하나님 말씀의 완전한 축자영감과 권위를 수호하려 하였다.

 자유주의자들이 읽고 있는 성경은 보수주의자들의 성경과 다르다고 비판한 그레셈 메이첸(J. Gresham Machen)은 ‘기독교와 자유주의’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자유주의가 기독교와는 근본적으로 상이하다는 것은 조금도 기이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토대가 서로 다른 까닭이다. 기독교는 성경의 토대 위에 서 있으며 그 자유와 생활을 성경에 기초를 둔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죄많은 인간의 변화하는 정서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이다.” ‘레노바레 성경’을 수용하는 것은 곧 자유주의의 성경관을 수용하는 것이다.

2) 역사관

포스터는 교회사에 대하여 남다른 관심을 보여 왔다. 풀러신학교에서 상담학으로 목회학 박사를 받고 줄곧 영성신학을 가르쳤던 그는 역사학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교회사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게 된 분명한 이유가 있다. 또한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관점에서 교회 역사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해석하려 한다. 또한 그는 교회 역사의 맥락에서 레노바레 운동의 의의를 찾으려 한다.

 우리는 포스터가 1998년에 출판한 ‘생수의 강’에서 그의 역사관을 쉽게 접해 볼 수 있다. 그는 이 책에서 교회사의 흐름을 6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묵상의 전통, 성결의 전통, 카리스마의 전통, 사회 정의의 전통, 복음의 전통, 성육신의 전통이다.

 여기서 열거한 전통들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포스터의 관심은 제도화된 교회가 남긴 역사의 발자취에 있지 않다. 그보다도 그는 ‘영적 삶의 강물’로 비유되는 교회의 전통이 지닌 중요성을 드러내려하고 있다. 이 강물의 물줄기들은 때로는 고립되기도 하고 분리되기도 하였지만,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하나로 모아 다시 힘차게 흐르도록 하신다고 설명한다.

포스터는 대부분의 교회사가(敎會史家)들이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거나 외면하는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시도하고 있다. 그는 과거의 역사의 중심으로부터 고립, 소외, 그리고 분리되었던 전통들이 이 시대에 새롭게 부상하고 있음을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바로 이런 의도로 포스터가 교회사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포스터는 자신이 제시한 6가지의 교회사의 흐름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예수를 본받고 닮아가는 삶(Christlikeness)을 귀중한 신앙의 모범으로 삼는 것이다. 그는 예수님처럼 기도하고, 덕을 쌓고, 성령에 충만하고, 넘치는 사랑을 실천하였던 개인과 단체에 대해서 교회사적으로 그 가치를 높게 평가하였다. 그는 교리적 관점에서 역사를 해석하기를 거부하는 반면, 분명하게 삶의 모범을 제시하시는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사느냐의 여부를 신앙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가 예수를 본받는 일을 신앙의 본질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스터가 전통적인 교회사의 서술을 거부하고 자기 나름대로 교회사의 흐름을 재편성하면서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게 되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교회의 역사 가운데 나타났던 신학 전통의 특성을 아예 무시했다는 점이다. 몇 가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먼저 ‘묵상의 전통’의 흐름을 나타낸 도표에 포스터의 그의 넓은 역사관이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여기서 2000년 동안 교회사에 나타난 여섯 가지의 ‘중요한 운동’을 소개하였는데, 사막의 수도사와 수녀들, 베네딕트회 수도회, 성 클라라 수녀회, 공동 생활 형제 자매회, 모라비안 운동, 그리고 경건주의 운동 등이다. 또한 이곳에서 그는 여러 ‘주목할 인물’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중에는 이집트의 안토니우스, 닛사의 그레고리, 노르위치의 줄리안, 십자가의 요한, 리시우의 테레사 등의 신비주의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20세기의 인물들로 선정된 세 사람, 캐서린 휴에크 드 도허티, 토마스 머튼, 헨리 나우웬은 모두 카톨릭이다.

또한 ‘카리스마 전통’의 흐름을 나타낸 도표에서, 포스터는 ‘중요한 운동’을 몬타누스주의 운동, 그레고리안 전례 운동, 프란체스코 수도사들, 재세례파, 오순절 운동, 은사주의 운동의 부흥, 그리고 현대 예배의식 각성을 꼽았다. 또한 ‘주목할 인물’로 몬타누스, 빙겐의 힐데가르드, 조지 폭스, 윌리엄 시모어, 오랄 로버츠, 그리고 존 윔버 등을 들었다. 이들도 모두 보수적인 신학의 전통에서 이탈한 개인과 단체들이다.

포스터는 교회의 역사에 대하여 솔직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섭리 가운데 지난 2천년 동안 이끌어 오신 교회의 흔적을 자신이 만든 ‘영적 삶의 강물’이라는 개념으로 대체하려 한다. 문제는, 교회 역사에 대한 기초적 이해가 없는 독자들에게 심각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이다.

포스터가 재구성하여 소개하는 교회역사를 비판적으로 읽을 수 없는 일반 성도들은 그의 잘못된 주장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히 객관성을 무시하고 ‘주관적’으로 교회 역사를 해석하는 실수를 범한 것이 아니다. 교회 역사에서 자신이 평생토록 힘써온 ‘영적 형성’의 의미를 찾고 그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교회사의 진실을 왜곡시키는 초강수를 둔 것이다.

3) 구원관

종교개혁은 카톨릭의 부패와 타락을 척결하고 성경의 권위와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함으로써 교회를 새롭게 변혁시키고자 했던 운동이다. 특히 요한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자들은 후대 교회에게 전적인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에 대한 교리를 분명히 하였다. 그런데 포스터는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를 혼합시킴으로써 종교개혁자들이 후대에게 물려준 귀중한 유산을 애써 거부하려 한다.

포스터는 2004년 Theology Today에 하나님이 은혜로 베푸시는 구원의 속성을 설명하는 ‘Salvation is for Life'라는 논문을 기고하였다. 이 논문에서 포스터는 구원은 곧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비록 그가 선택한 단어는 성경적으로 보이지만, 그 표현의 의미는 종교개혁자들의 구원관으로부터 명백히 이탈한 것이었다. 그가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생명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현재 우리가 소유한 “새로운 삶의 질서”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포스터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생명을 지닌 성도는 이 세상에서 그 속사람의 심원이 갱신되어 창조물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완벽한 자녀로 변화되는 것을 신앙생활의 목적으로 삼게 된다. 이들은 새로운 삶의 질서를 지녔기 때문에 새로운 삶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초청에 적극적으로 응할 수 있으며, 또한 반드시 그렇게 하여야 한다. 포스터는 로마 카톨릭의 신인협동론적인 반펠라기안주의를 그대로 도입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주입된 은혜(infused grace)를 통하여 인간의 행위(work)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종교개혁자들은 칭의는 십자가의 공로를 근거로 하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법적 선언이라는 것과, 이후로부터 우리는 평생토록 성화의 삶을 살다가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어 성화에 이른다는 사실을 성경에서 발견하였다. 그러나 포스터는 죽음 이후에나 이루어질 영화가 이 땅에서 성화와 함께 이미 시작된다고 보았다.

종교개혁자들은 포스터의 주장과 정반대로 타락한 인간은 부패와 무능으로 인하여 어떤 노력으로도 그리스도를 그대로 본받을 수 없다고 가르쳤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최고의 거룩한 행위는 결코 반복될 성격이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얻으며, 거룩하게 되고, 나아가서 영화롭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신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참예함으로써 그와 한 몸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하였기 때문에 그의 생명을 지닌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그리스도를 인위적으로 흉내내며 닮는 사람들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리스도를 닮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포스터의 견해를 선택하는 것은 로마 카톨릭의 반펠라기안주의적 구원관을 수용한다는 것이요, 그것은 곧 종교개혁자들의 유산을 포기하는 행위이다.

3. 포스터와 레노바레의 사명

1) 신비주의적 내적 변화

포스터의 베스트셀러 ‘영적훈련과 성장’의 영향력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1978년부터 이 책을 통하여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이 책은 레노바레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그것은 ‘내적 변화’이다. 그는 이 책에 ‘들어가는 글’을 다음과 같이 마치고 있다. “우리 인생의 내적변화가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가치가 있는 목표라는 것을 믿는 사람이 되도록 하자.”

포스터가 퀘이커교도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그가 내면의 세계에 관심에 갖는 것은 너무 자연스런 일이다. 그의 신학적 뿌리는 17세기 영국에서 퀘이커교를 단독적으로 창시한 조지 폭스(George Fox)의 내적 체험에 있다. 폭스는 모든 사람 안에 ‘내면의 빛’(inner light)을 지니고 있는데, 누구든지 스스로 이 빛을 바라볼 때 하나님과의 교감이 이루어지는 신적 체험을 하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영적훈련과 성장’에서 조지 폭스가 7번 언급되지만, 그의 ‘내면의 빛’에 대한 직접적인 서술은 없다. 그렇다고 포스터 자신의 신앙적 뿌리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 도리어 그 기초 위에 자신의 사역과 삶의 방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세 가지를 혼합하였다. 이때부터 포스터는 신비주의적 영성을 간직하게 되었으며, 이 사상에 기초하여 ‘영적훈련과 성장’을 저술한 것이다.

포스터는 ‘영적 훈련과 성장’에서 영적 훈련(Spiritual Discipline)을 내적 훈련(묵상, 기도, 금식, 학습), 외적 훈련(단순성, 홀로 있기, 복중, 섬김), 그리고 단체 훈련(고백, 예배, 인도하심, 축전)으로 나누었다. 그러나 그는 내적 훈련을 더욱 중요시 여겼는데, 내적 변화가 일어나면 자연스럽게 그 결과로서 외적 변화를 생긴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포스터는 내적 훈련 중에서도 묵상 훈련을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여겼다. 그가 ‘내적 변화’를 위한 훈련은 교회역사의 맥락에서 볼 때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는 자신이 기독교 신비주의 전통에 사상적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2) 내적 변화의 방법: 영적 형성

포스터의 내적 변화에 대한 관심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찾도록 하였다. 그것은 성경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란 주제로 풀어가는 그의 방식의 구체적인 적용점이다. 성경에 보면 아담, 에녹, 또는 노아와 같이 하나님과 직접적인 대화를 하면서 교제를 나눈 자들이 있다.

그런데 포스터는 지금도 이런 방식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특별한 사람들에 의해서 계속되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누구인가? 하나님과의 사귐이 가능할 수 있도록 자신의 성품을 책임지고 새롭게 형성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은 창조이래 항상 이러한 관계를 맺기를 원하시지만 문제는 인간에게 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레노바레는 ‘영적 형성’(Spiritual Formation)을 선택하였다. 레노바레는 영적 형성을 매우 심각한 신앙 훈련으로 간주한다. 왜냐하면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하나님과의 일치(一致)를 추구하는 성품과 정체성을 키워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레노바레 성경’은 영적 형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간이 하나님과 개인적인 교제(communion)를 나누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 삶에 직접 임재하시는 이로움을 누릴 수 있다.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인생의 방향을 찾는 것이다. 하나님과 나누는 친밀하고 개인적인 의사소통(communication)은 영성 개발(영적 형성)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같이 친밀하고 개인적인 의사소통을 지속해야 하며,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선하심을 온전히 확신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여기서 그들은 ‘하나님과의 대화’와 ‘하나님과의 교제’를 구분한다. ‘하나님과의 대화’는 ‘영적 형성’의 주된 사명이다. 이 대화는 중재자가 없는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직접적으로 이루어진다. 성령의 도우심이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의 친밀한 가운데 이루어지는 대화이다.

그러나 그 대화 자체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대화’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한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교제를 가능하게 하는 도구 또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창세기 이후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려온 소수들은 하나같이 스스로 영적 형성을 통하여 ‘하나님의 교제’가 가능한 성품으로 새롭게 형성된 자들이다. 포스터는 현대인들도 '영적 형성’를 통하여 과거와 동일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이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Christlikeness)의 중요성은 절대적이다. 레노바레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은 사역의 목적에 둠으로서, 그리스도와 같은 제자들로 훈련시키는 것을 영적 형성의 우선적 사명으로 삼는다. 실상 그리스도를 닮는 것은 신앙의 본질이며 그가 성도의 삶 중심에 반드시 그가 계셔야 한다. 그러나 포스터가 의미하는 그리스도를 닮는 삶은 이와 전혀 다른 뜻을 지니고 있다.

그가 1996년에 Christianity Today에 기고한 ‘그리스와 같이 됨’(Becoming Like Christ)라는 글을 살펴보자. 그는 이곳에서 성도들의 신앙생활에서 평생토록 지녀야 할 궁극적인 목적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형성되고(form), 일치되고(confirm), 변형되는(transform)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된 삶의 책임은 궁극적으로 성도들에게 있다.

성령은 교사, 안내자, 그리고 상담자의 역할을 하시면서 확신과 용기를 주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성도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이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성도들은 ‘공식적 방법’인 기도, 학습, 금식, 고독, 단순, 고백, 기쁨 등의 훈련을 제대로 실천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영적 형성의 가장 훌륭한 모범이 되시기 때문이다.

레노바레가 말하는 ‘영적 형성’은 그리스도와 동일한 삶이 습관적으로 자리 잡힐 때까지 반복적인 훈련을 거듭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지녔던 습관을 반복적인 모방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포스터는 이러한 ‘공식적 방법’에 근거한 훈련에 임할 때에 “우리의 열정적이고 바른 정보에 입각한 행동이 없이는 그리스도와 닮은 습관과 성향(Christlike habits and disposition)을 성숙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할 것을 요구하였다.

묵상은 우리 자신이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것을 요구하며 하나님께서 지금 말씀하고 계시고 또한 우리에게 말씀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예수님과 신약의 저자들은 묵상이 종교 전문가들(제사장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시인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보편적인 제사장이 된다. 그러므로 그들 모두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고 살아 계신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다.

나아가서 포스터는 ‘영적 형성’의 모범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묵상 방법을 소개한다. 그것은 놀랍게도 ‘상상(imagination)에 근거한 묵상이다. 상상이란 상당히 주관적일 뿐 아니라 성경도 이에 대하여 결코 긍정적이지 않다. 그래도 포스터는 상상에 근거한 묵상을 소개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예수님 자신도 이 방법으로 가르치시며 늘 상상력에 호소하셨다. 많은 경건의 거장들도 마찬가지로 이 길을 권장한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경건의 거장은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와 프랑수아 드 살르(Francis de Sales)로서 두 사람 모두 신비주의자이다. 이와 같이 포스터는 신비주의자들의 방법을 여과 없이 소개하면서 상상에 근거한 묵상의 정당화를 찾으려하였다.

포스터는 여러 신비주의자들 가운데 20세기의 최고의 영성가로 알려진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의 말을 그의 책에 즐겨 인용한다. ‘영적훈련과 성장’에서도 묵상을 어렵거나 복잡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 포스터는, 특별한 방법을 배우려하지 말고 자유스럽게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권유하면서 머튼의 글을 인용하며 소개하였다.

머튼은 1948년 출간한 자서전 ‘칠층산’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인물로서 평생토록 ‘하나님과의 연합’을 위한 관상기도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보였었다. ‘하나님과의 연합’이란 단어는 결코 새로운 것은 아니다. 칼빈도 ‘기독교 강요’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수적인 거룩한 삶의 중요성을 교훈하면서 이 개념을 소개하였다.

그러나 머튼은 전혀 다른 의미에서의 ‘하나님과의 연합’을 언급하고 있다. 이 연합은 실재의 하나님과의 직접적이고 체험적인 만남으로서, 머튼은 수도원적 수도사들이 하나님과의 합일을 지적할 때 사용하였던 ‘관상’(Contemplation)이라는 단어로 그 뜻을 설명한다.

관상은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의 영으로 되는 신비한 상태를 가리킨다. 머튼은 ‘관상의 새로운 씨앗들’(The Seeds of Contemplation)이라는 책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관상은 “우리 안에 있는 생명과 존재가 눈에 보이지 아니하며 초월적이며 무한하게 풍성한 근원(Source)으로부터 유출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생생한 깨달음이다. 관상이란 무엇보다 그 근원에 대한 실재를 인식하는 것이다.”

그에게 관상이란 마치 직접 보고 만지는 것과 같은 실제적인 경험이지만 동시에 매우 신비하여 “언제나 우리의 지식, 우리의 판단, 조직적인 체계, 설명, 강화, 그리고 우리 자신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다.” 결국 머튼이 말하는 관상이란 포스터가 설명하는 ‘하나님과의 교제’와 유사한 것이다.

그러나 관상에 이르는 길은 그리 쉽지 않다. 머튼은 십자가의 요한(John of the Cross)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면 감각의 어두운 밤을 지나 관상에 이른다고 말한다. 이 밤은 모두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첫 밤은 마치 만물이 시야에서 시작되는 때, 두 번째 밤은 자정과 같이 완전한 어둠에 사로잡힌 때, 그리고 세 번째 밤은 빛으로 가까이 다가선 밤의 끝부분이다. 이 과정은 매우 오래 걸리기도 하며 노력한다고 항상 이루어지는 보장도 없다. 어둠의 밤을 지나려면 인내하며 무한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관상 기도’(Contemplative Prayer)는 무엇인가? 그것은 관상의 상태에 이르게 하는 매우 구체적이며 효과 있는 방법이다. 이 기도는 특별한 형식이나 지적인 활동을 요구하지 않는다. 머튼은 종교개혁 이후 로마 카톨릭 교회의 기도가 변질되었다고 보았다. 무엇보다 과거 수도원에서 행하여지던 관상기도의 원리를 상실하였다는 점을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관상기도’ (Contemplative Prayer)를 저술하면서 수도원적 관상기도의 부활을 촉구하였던 것이다.

관상에 이르게 하는 기도가 되기 위하여 반드시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였던 것을 중단하여야 한다. 그리고 어두움의 밤이 그치도록 노력을 그치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머튼은 반복의 결과로서 얻어지는 관상기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관상 기도란 그것이 습관으로 자리 잡을 때에 그 이름의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역시 머튼의 관상기도는 포스터의 ‘하나님과의 대화’와 그 의미가 유사하다.

무엇을 말하는가? 포스터는 카톨릭 신비주의자인 머튼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그의 개념을 자신의 언어로 새롭게 표현한 것이다. 머튼과 포스터는 동시에 인간의 내면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합일’이라는 신비한 경험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정체성이 독자적으로 있는 것을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정체성만 있는 것을 말한다.

만일 ‘하나님과의 대화’ 또는 ‘관상 기도’가 자신의 자아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상태로 인도하는 도구라면, 엄격한 의미에서 그것은 묵상이나 기도가 아니다. 어느 종교나 기도를 가르친다. 중요한 것은 기도의 대상과 목적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기도는 그 대상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심을 확신하고 그의 긍휼하심을 구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빛을 기다리며 어둠속을 방황하는 것은 결코 기도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기도를 신앙 훈련 중에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였던 칼빈은, 성도가 기도할 때에 반드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가질 것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것을 강조하였다.

결 론

포스터는 신비주의자이며 카톨릭 영성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어찌 보면 그가 2007년 기자회견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은 신비주의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있으며 자신이 인용하는 자들이 16세기 이전의 인물들이 모두 카톨릭이라고 한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는 신비라는 말을 쓰지 않으면서 신비주의적 사상을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제 한국교회는 포퓰리즘 뒤에 숨겨져 있는 포스터와 레노바레의 정체성으로 인하여 계속된 신학 논쟁은 종식되어야 한다. 도리어 영성이라는 이름으로 교회 안에 깊이 들어와 있는 비성경적이며 반종교개혁적인 보이지 않는 큰 힘을 대항하여 한국교회와 성도들을 보호하여야 한다.

한국교회는 요즈음 영성(spirituality)이 대세이다. 영성이란 기독교의 독특한 성향이 아니다. 카톨릭, 이슬람, 불교도 영성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영성은 타 종교가 기독교의 담을 쉽게 넘는 도구가 되었다.

실상 한국교회에 영향을 주고 있는 소위 영성의 대가들이 그 증거가 된다. 토마스 머튼, 헨리 나우웬, 리처드 포스너, 유진 피터슨, 필립 얀시 등은 모두 같은 사상을 지닌 자들이다. 그들의 프로필과 글에 나타난 접근방법은 서로 상관이 없어 보여도, 그들은 신비주의적 카톨릭 영성을 기독교에 심어놓기 위하여 힘을 합쳐 한국교회를 압박하고 있다.

포스터와 레노바레가 한국교회를 향해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대형주의와 실용주의로 인한 영적 침체로부터 탈출하라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귀담아 들어야 할 소리이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방법으로는 결코 한국교회는 회복될 수 없다. 도리어 더 큰 혼란과 분열에 빠질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종교개혁자들이 남겨준 유산의 가치를 재발견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와 복음의 능력을 붙잡아야 한다. 나아가서는 성경이 가르치는 영적 성숙의 원칙과 교회 갱신의 원칙을 분명히 하고, 한국교회의 새로운 비약을 위하여 열정을 다해 달려야 한다. Last modified : 2013.12.14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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